힘나시아 라플라타는 1887년 6월 3일 설립된 아르헨티나의 스포츠 클럽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 중 하나이다. 라 플라타 시를 연고지로 하며, 축구를 비롯하여 농구, 배구 등 다양한 종목의 팀을 운영했다. 1929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우승했으며, 1994년에는 코파 센테나리오 데 라 AFA에서 우승했다. 힘나시아 라플라타는 "엘 로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와의 경기는 클라시코 플라텐세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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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나시아 라플라타 - 에스타디오 후안 카르멜로 세리요 에스타디오 후안 카르멜로 세리요는 아르헨티나 라플라타에 위치한 짐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 플라타의 홈 경기장으로, '엘 보스케'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개장 후 구조 변경 및 안전 시설 보강, 사용 중단 및 개보수를 거쳐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힘나시아 라플라타 - 클라시코 플라텐세 클라시코 플라텐세는 아르헨티나 라플라타를 연고로 하는 에스투디안테스 라플라타와 김나시아 라플라타 간의 축구 더비 경기로, 1931년 프로 축구 시대 이후 치열한 경쟁을 이어오며 1937년 8-2 경기와 2006년 7-0 경기가 대표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1887년 설립된 축구단 - 함부르거 SV 함부르거 SV는 독일 함부르크 연고의 축구 클럽으로, 푸스볼-분데스리가 원년 멤버이자 한때 리그에서 성공적인 클럽 중 하나였으며 1983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6회 독일 챔피언십 우승, 3회 DFB-포칼 우승을 기록했으나 2017-18 시즌 강등 이후 2. 분데스리가에 머물고 있다.
1887년 설립된 축구단 - 블랙풀 FC 블랙풀 FC는 1887년 창단된 잉글랜드 프로 축구 클럽으로, 1953년 FA컵 우승과 2010-11 시즌 프리미어리그 승격,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와의 오랜 라이벌 관계, 블룸필드 로드를 홈 구장으로 사용, 2019년 사이먼 새들러의 구단주 취임 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힘나시아 라플라타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고
전체 이름
Club de Gimnasia y Esgrima La Plata (클루브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 플라타)
별칭
El Lobo (엘 로보, 늑대) Los Triperos (로스 트리페로스, 곱창 처리인)
힘나시아 y 에스그리마는 1929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1] 이후 1944년, 1947년, 1952년에 프리메라 B에서 우승했고, 1994년에는 코파 센테나리오 데 라 AFA에서 우승했다.[1] 또한,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5번 준우승을 차지했다.[1] 이 클럽은 73시즌 동안 아르헨티나 축구 최상위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뉴웰스 올드 보이스와 함께 8번째로 오랫동안 참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사투르니노 페르드리엘은 클럽의 초대 회장이자 창립자였다. 그는 라 플라타 시 초창기 시절 상인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재무부 공무원이었다. 그는 1년 동안 회장직을 맡은 후 1888년에 사망했다.[1]
현재 클럽 회장은 3년마다 열리는 총선거를 통해 회원들이 선출한다.[15] 18세 이상, 클럽 회원 자격 3년 이상인 회원은 투표권이 있으며, 회원 자격 7년 이상인 회원은 클럽 관리 위원회 또는 "이사회"에 선출될 수 있다. 가장 최근 회장은 가브리엘 페예그리노인데, 2019년에 재선을 거부했다가[16][17][18] 2019년 12월 15일, 클럽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의 권유로 재선에 도전하여 3년 임기로 다시 선출되었다.[19]
1929년 팀은 현재까지 유일한 프리메라 디비시온 타이틀을 획득했다. 프란시스코 바랄로는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다
사투르니노 페르드리엘은 클럽의 초대 회장이었다.
2. 1. 창단과 초기 역사 (1887-1915)
1887년6월 3일 시민 조합에 의해 설립된 힘나시아 라플라타는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다.[91] 라 플라타 시가 만들어진 1882년으로부터 겨우 5년 후에 만들어졌다. 클럽의 이름은 체조와 펜싱을 의미하며, 19세기 말 상류층에서 주로 즐기던 스포츠였다. (1880년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이미 Gimnasia y Esgrima de Buenos Aireses라는 스포츠 클럽이 존재했다.)[8] 이후, 육상, 축구, 농구, 럭비 등의 종목이 추가되었다.[8]
이 클럽은 몇 차례 이름을 변경했다. 1897년 4월부터 12월까지는 펜싱이 유일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클럽 데 에스그리마"(펜싱 클럽)라고 불렸다. 1897년12월 17일 "클럽 데 힘나시아 y 에스그리마"(체조 및 펜싱 클럽)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2년 7월부터 1955년9월 30일까지 라 플라타 시가 에바 페론의 사망 후 "에바 페론"으로 변경되면서 "클럽 데 힘나시아 y 에스그리마 데 에바 페론"(에바 페론의 체조 및 펜싱 클럽)으로 불렸다. 해방 혁명 정부 동안 도시와 클럽은 이전 이름을 되찾았다. 1964년8월 7일 새 정관 승인 후 "클럽 데 힘나시아 y 에스그리마 ''de'' 라 플라타"(라 플라타의 체조 및 펜싱 클럽)로 잘못 표기되었다.[3]
힘나시아 y 에스그리마는 1915년 아르헨티나 축구의 디비시온 인터미디아에서 챔피언이 된 후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1]
2. 2. 팀 명칭의 변천
기간
명칭
1897년 4월 ~ 12월
클럽 데 에스그리마 (Club de Esgrima|클럽 데 에스그리마es)
1897년 12월 ~ 1952년 7월
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Club de Gimnasia y Esgrima|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es)
1952년 7월 ~ 1955년 9월
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 에바 페론 (Club de Gimnasia y Esgrima de Eva Perón|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 에바 페론es)
1955년 10월 ~ 1964년 8월
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 라 플라타 (Club de Gimnasia y Esgrima de La Plata|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 라 플라타es)
1964년 8월 ~ 현재
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 플라타 (Club de Gimnasia y Esgrima La Plata|클럽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 플라타es)
[3]
2. 3. "엘 로보"의 탄생과 전성기 (1960년대-1990년대)
힘나시아 라 플라타의 애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엘 로보(El Lobo, 늑대라는 뜻)이다. 이 애칭은 1962년 시즌에 팀이 훌륭한 축구를 보여준 것에서 유래했다. 이 시즌에 힘나시아는 9연승을 기록하며 15라운드까지 무패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3위를 기록했지만 우승 경쟁을 벌이는 활약을 펼쳤다. 이 애칭의 아이디어는 힘나시아의 경기장이 라플라타 시의 숲 속에 위치해 풍요로운 자연 속에 있었고, 이 팀이 빈틈없이, 빠르게, 동물적이면서 마치 늑대와 같았기 때문이다. 이 애칭은 클럽을 상징하는 별명이 되었다.[1]
또한 로스 트리페로스(Los Triperos: 대식가라는 뜻)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이는 클럽 초창기, 서포터들 중 도축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이 자신들을 이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
2. 4. 마라도나 감독 시대 (2019-2020)
디에고 마라도나es는 2019년부터 2020년까지 힘나시아 라플라타의 감독을 맡았다.[1]
정치적 성향: 주어진 소스에 마라도나에 대한 특별한 정치적 언급이 없으므로 중립적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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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기장
힘나시아 라플라타는 후안 카르멜로 세릴로 경기장 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160헥타르 규모의 '에스탄시아 치카'는 프로 축구팀 훈련장이며, 11헥타르 규모의 '엘 보스케시토'는 유소년 팀 훈련 캠퍼스이다. 클럽은 1999년 유치원, 2001년 "Dr. René Favaloro" 초등학교(123번가와 58번가), 2008년 고등학교를 개교하여 교육 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1978년에 개장한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종합경기장은 농구와 배구 1부 리그 경기가 열리는 스포츠 단지로, 2,6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음악 공연 시에는 3,50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 클럽 본부는 클럽 행정 및 회원 관리를 담당하며, 다양한 스포츠 활동과 체육관 시설을 제공한다.
2006년 코파 수다메리카나 플루미넨세전에서 힘나시아는 50,000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여 시립 경기장 수용 기록을 세웠다. 이 경기는 힘나시아의 2-0 승리로 끝났다.[46]
3. 1. 후안 카르멜로 세리요 경기장 ("엘 보스케")
후안 카르멜로 세리요 경기장은 "엘 보스케"(스페인어로 "숲"을 의미하며, 같은 이름의 라플라타 공원에 위치해 있기 때문)로 알려져 있으며, 24,544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46]
2005년까지 사용되다가 새로운 시립 경기장이 라플라타에 건설되면서 새로운 안전 규정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2006년 ''클라우수라'' 토너먼트에서 힘나시아는 시립 경기장을 홈 경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46]
2008년 3월부터 힘나시아는 구장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 기존 경기장에 다양한 개조 공사를 실시했고, 2008년 6월 "엘 보스케" 구장은 1부 리그 경기에 대한 재승인을 받았다. 2008년 6월 21일, 2008년 클라우수라 챔피언십 마지막 경기에서 힘나시아는 라누스와의 경기를 통해 기존 홈구장으로 돌아왔다.[47][48]
3. 2. 에스타디오 시우다드 데 라플라타
힘나시아 라플라타는 후안 카르멜로 세릴로 경기장 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프로 축구팀 훈련장인 '에스탄시아 치카'는 160헥타르 규모이며, 유소년 팀 훈련 캠퍼스인 '엘 보스케시토'는 11헥타르 규모이다. 1999년 유치원, 2001년 초등학교, 2008년 고등학교를 개교하여 교육 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종합경기장은 1978년에 개장하여 농구와 배구 1부 리그 경기가 열리며, 2,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본부에서는 클럽 행정 및 회원 관리를 담당하며, 다양한 스포츠 활동과 체육관 시설을 제공한다.
4. 라이벌 관계
라플라타의 두 주요 축구팀인 힘나시아 라플라타와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간의 경기는 클라시코 플라텐세(라플라타 더비)라고 불린다.[11] 첫 공식 더비는 1916년 8월 27일 프리메라 디비시온 시즌 중에 열렸으며, 힘나시아가 루도비코 파스토르의 자책골로 에스투디안테스를 1-0으로 이겼다.[11]
프로 시대의 첫 더비는 1931년 6월 14일에 열렸다. 1932년 8월 12일부터 1934년 9월 9일까지 힘나시아는 라플라타 더비에서 5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6~08년에 에스투디안테스가 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이 더비에서 가장 긴 연승 기록이었다. 1963년 6월 25일 힘나시아는 5-2로 승리하여 에스투디안테스를 상대로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반면, 힘나시아의 최악의 결과는 2006년 10월 15일 7-0으로 패배한 것이다.[12]
1992년 4월 5일에는 힘나시아가 에스투디안테스의 경기장에서 1-0으로 승리했는데, 관중석이 폭발하고 힘나시아 팬들이 골을 축하하는 동안 현지 천문대의 지진계가 저강도 지진 현상을 기록했다. 이 골은 우루과이 출신 호세 페르도모가 프리킥으로 넣은 골로, "엘 골 델 테레모토"("지진 골")로 불리게 되었다.[13][14] 이 클라시코는 아르헨티나에서 5번째로 관심이 많은 클라시코이다.
5. 우승 기록
힘나시아 라플라타는 1929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64] 1993년 코파 센테나리오 데 라 AFA 우승,[69]프리메라 B 3회 우승(1944, 1947, 1952년),[65][66][67][68] 1915년 디비시온 인터미디어 우승, 1915년 코파 불리치 우승[70]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힘나시아 라플라타는 133년의 역사 동안 1군에서 800명이 넘는 선수들이 뛰었다. 이 팀은 기예르모, 구스타보 바로스 셰로토, 마리아노 메세라, 루카스 로보스, 로베르토 "팜파" 소사, 안드레스 구글리에민피에트로, 세바스티안 로메로, 루카스 리히트, 에르난 크리스탄테, 레안드로 쿠프레 등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은 선수들을 하위 리그에서 배출했다.[1]
하위 리그에서 기예르모와 구스타보 바로스 셰로토, 마리아노 메세라, 루카스 로보스, 로베르토 "팜파" 소사, 안드레스 구글리에민피에트로, 세바스티안 로메로, 루카스 리히트, 에르난 크리스탄테, 레안드로 쿠프레를 비롯하여 국내 및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수많은 축구 선수들이 배출되었다.[1]
7. 기타 스포츠
1924년 힘나시아 라플라타 최초의 농구팀
농구는 1920년대에 힘나시아 라플라타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1924년, 클럽은 60번가와 118번가 교차로에 경기장을 건설했다. 그 이후로, 농구는 클럽의 주요 스포츠 중 하나가 되었다.[55]
농구팀은 1978년과 1979년 시즌에 오브라스 사니타리아스를 상대로 두 번의 메트로폴리타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정점을 찍었다.[56] 팀에는 "가예고" 곤잘레스, "피니토" 게어만, 페이나도와 같은 선수들과 마이클 잭슨, 로렌스 잭슨 주니어와 같은 미국 선수들, 그리고 1979년 리그 MVP로 선정된 클래런스 에드거 메트칼프가 포함되었다. 롤란도 스페어가 두 번의 챔피언 팀을 이끌었다.[56][57]
힘나시아는 2003–04 리가 나시오날 데 바스켓볼에서 보카 주니어스에게 4–2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58][59] 다음 시즌에 팀은 후안 호세 무뇨스 회장이 농구 예산을 삭감하여 주요 선수들을 잃게 되면서 TNA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60]
힘나시아의 주목할 만한 농구 선수로는 카를로스 "가예고" 곤잘레스, 에르네스토 "피니토" 게어만, 로베르토 로페스, 카를로스 베하라노, 마리아노 세루티 등이 있다. 코치로는 호세 리풀로네, 미겔 안헬 리풀로네, 곤잘로 가르시아가 있다.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는 여성 배구 팀도 보유하고 있으며, ''페데라시온 데 볼레이볼 이 펠로타 알 세스토''의 9개 창립 클럽 중 유일하게 여전히 배구를 하고 최고 디비전에서 활동하고 있다.[61] 이 연맹은 현재 ''페데라시온 메트로폴리타나 데 볼레이볼'' (FMV)이다.[62]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 플라타는 역사상 다른 종목에도 참여했다. 현재 클럽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스포츠는 다음과 같다.
럭비 유니언: 1933년, 아르헨티나 럭비 연합은 다른 스포츠에 프로 선수로 참여하는 클럽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힘나시아 럭비 팀은 "Gimnasia y Esgrima La Plata Rugby Club"로 이름을 변경해야 했다. 4년 후, 럭비 활동을 독립적인 기관을 통해 진행하기로 결정하여 "라 플라타 럭비 클럽"을 설립했으며,[63] 현재 토르네오 데 라 URBA에서 경쟁하고 있다.
탁구: 1945년에서 1951년 사이에 "Asociación Platense de Tenis de Mesa"("라 플라타 탁구 협회", 아르헨티나 탁구 연맹 소속)가 있었다. 힘나시아는 협회의 창립 멤버였으며, 이 기간 동안 조직된 대부분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그레코로만 레슬링: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클럽은 그레코로만 레슬링 팀을 운영했다.
체조: 1930년대 동안, 체조는 클럽 활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힘나시아 팀의 멤버들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이 종목은 1976년 이후 중단되었다.[56]
그 외에도 다양한 시기에 수구, 복싱, 사이클, 페탕크, 자동차 경주, 유도 등이 클럽에서 운영되었다.
8. 엠블럼 및 유니폼
힘나시아 라플라타의 엠블럼은 화환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상단에는 문장 깃발이 달린 투구가 있다. 중앙에는 클럽의 색상(흰색과 남색) 바탕에 클럽의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 상단 모서리에는 검과 플뢰레의 손잡이가 보초처럼 나타나며, 날카로운 부분은 방패 하단에서 나타난다.[1][22]
구단 엠블럼은 창단 이후 몇 차례 수정되었다. 첫 번째 상징은 1888년 4월 30일자 문서에 라플라타의 문장이 "Club de Gimnasia y Esgrima La Plata –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문구로 둘러싸인 형태로 나타났다. 1901년, GELP 이사이기도 했던 예술가 에밀리오 쿠타레가 첫 번째 문장을 디자인했는데, 수작업으로 장식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이 상징은 작은 크기로 쉽게 복제할 수 없어, 구단은 기술 설계사 라울 펠리세스에게 더 간결한 문장을 디자인하도록 의뢰했다. 그 결과 1928년에 새로운 상징이 출시되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23]
에밀리오 쿠타레(1901)가 디자인한 구단의 첫 번째 문장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의 공식 유니폼은 정관에 명시된 대로, 클럽 방패에 나타난 색상(흰색 바탕에 가슴에 진한 남색 가로 줄무늬)을 기반으로 한다. 구단 초창기에는 아르헨티나 클럽임을 강조하기 위해 흰색과 하늘색을 채택했다. 1905년에는 라싱 클럽과 구별하기 위해 색상을 흰색과 진한 남색 세로 줄무늬로 변경했다.[24] 1910년에는 흰색 유니폼 위에 진한 남색 가로 띠 형태로 디자인이 변경되었고, 이후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25]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의 현재 엠블럼은 화환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상단에는 문장 깃발이 달린 투구가 있다. 중앙에는 클럽의 색상(흰색과 남색) 바탕에 클럽의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 상단 모서리에는 검과 플뢰레의 손잡이가 보초처럼 나타나며, 날카로운 부분은 방패 하단에서 나타난다. 중앙 양 옆에는 투구를 둘러싼 월계수가 펼쳐져 있다.[1][22]
구단 엠블럼은 창단 이후 몇 차례 수정되었다. 구단의 첫 번째 상징은 1888년 4월 30일자 문서에 나타났는데, "Club de Gimnasia y Esgrima La Plata –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문구로 둘러싸인 라플라타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두 번째 문장은 1894년에서 1897년 사이에 나타났으며, 당시 구단의 유일한 활동이었던 "Club de Esgrima"(펜싱)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23]
1901년, GELP 이사이기도 했던 예술가 에밀리오 쿠타레가 첫 번째 문장을 디자인했다. 이 문장은 수작업으로 장식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이 상징은 작은 크기로 쉽게 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단은 기술 설계사 라울 펠리세스에게 더 간결한 문장을 디자인하도록 의뢰했다. 그 결과 1928년에 새로운 상징이 출시되었고, 이 상징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23]
헥토르 도밍게스 회장 재임 기간 동안 방패 중앙의 약어 CGE(Club de Gimnasia y Esgrima)는 GELP(Gimnasia y Esgrima La Plata)로 변경되었다. 발터 기산데 회장 취임 이후 'CGE'라는 원래 약어로 되돌리기로 결정했다.[1]
8. 2. 유니폼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의 공식 유니폼은 기관 정관에 명시된 대로, 클럽(단체) 방패에 나타난 색상을 기반으로 하며, 가슴에 진한 남색 가로 줄무늬가 있는 흰색 유니폼이다.
구단 초창기에는 아르헨티나 클럽임을 강조하기 위해 흰색과 하늘색을 채택했다. 팀이 처음 사용한 유니폼은 흰색과 하늘색 세로 줄무늬였다.[24]
1905년에는 라싱 클럽과 구별하기 위해 색상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흰색과 진한 남색 세로 줄무늬 유니폼이 탄생했다.[24]
1910년에 디자인이 변경되어 세로 줄무늬가 흰색 유니폼 위에 진한 남색 가로 띠로 바뀌었고, 이후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25]
다음 표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 팀의 의류를 제공하고 클럽을 후원해 온 회사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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